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 할 수 있도록 합시다.

2021년 1월 17일

   연중 제2주일인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모두 “부르심”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판관 사무엘을 부르시는 이야기이고, 복음은 요한의 제자였던 두 사람이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보고 따라나서는 내용입니다.

  “요한의 제자”라는 표현을 듣고 요한복음서의 저자인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 요한이 먼저 생각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라고 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공관복음과 달리 세례자 요한이라고 부르지 않고, 예수님을 증언하는 역할을 강조하여 그냥 “요한”이라고 부릅니다.

  제1독서에서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한 번에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사무엘은 엘리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세 번이나 듣고 나서야,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어렵게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은 사무엘은 “주님께서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고 전해줍니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이 사무엘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졌다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무엘의 부르심 이야기는 하느님의 말씀이 사무엘의 “들음”으로 전해졌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두 제자들도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라고 한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렇지만 요한의 두 제자들도 사무엘이 그랬던 것처럼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주님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두 제자의 대화를 보면 이들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을 따라오는 두 제자를 보고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하고 먼저 물어봅니다. 그런데 두 제자들은 무엇을 찾고 있는지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고, “스승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 1,38)하고 다른 질문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어디에 묵고 있는지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고, “와서 보아라”(요한 1,39)라고 또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리는 이 대화 안에 사실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개념이 함축되어있습니다. 그리스 철학과 현대인들의 생각 안에서 “진리”는 지적인 앎을 의미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는 지적인 앎을 포함한 인격적인 깨달음을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인격적인 깨달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진리가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인격적인 진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완전하게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증언된 하느님의 사랑이 진리라고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와서 보아라.”(1,39)라고 말씀하시고는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1,39)라는 말씀이 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오후 세시가 지난 다음에야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게 보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전해주는 표현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는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지만,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게 된 것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볼 수 있었던 오후 4시쯤이었던 것입니다. 그때서야 제자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것을 자신의 인격 전체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본 제자들이 당신의 십자가 사건을 보고 믿고 깨달아서 구원을 얻으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와서 보아라.”하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초대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면서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소개했습니다. 이 소개는 우리를 십자가 사건에서 성체성사로 인도해줍니다. 스스로 빵이 되어서 우리에게 먹히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성체성사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상징적인 표현들과 다른 차원의 대화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이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체성사를 생각하고 있을 때 비로소 이해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 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십자가 사건과 성체성사를 염두에 두고 “와서 보아라.”하신 것처럼 우리도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성체성사의 삶을 살 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하고 당당히 선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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