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3주일

2019년 5월 5일

어느새 부활 3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제관 앞 나무들의 나뭇잎은 제법 푸른 빛을 드러내며 봄 햇살을 즐깁니다. 그런데 사제관 구석에 있는 대추나무는 마치 겨울 추위에 죽은 양 아니면 아직도 겨울인 양 앙상한 마른 가지가 어수선하게 하늘을 찌릅니다. 그래서 죽었나 하고 가까이 가서 보니 아주 작게 눈이 터서 파릇한 싹이 나옵니다. 죽지는 않았지만 참 게으른 녀석입니다.

이렇게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봄의 햇살이 점점 가까워지며 세상은 화려한 꽃으로 파란 잎으로 덮이고 분주한 삶이 가득해집니다. “정말 부활이구나!” 하는 실감이 납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도 “빈 무덤” 을 보자마자 즉시 알아차린 제자 요한이 있는가 하면 굳이 확인한 다음에야 믿겠다던 토마스도 있습니다.

세상은 모두 똑같이 같은 시간에 같은 방법으로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같지만 다르게 살아갑니다. 빠른 이가 있고 느린 이가 있습니다. 누가 더 잘나고 못난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성격이고 방식입니다.

빠른 장점과 단점이 있고 느린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빠른 이가 느린 이를 보면 답답하지만, 또 느린 이가 빠른 이를 보면 정신 없습니다.

요즘 세상은 너무 빨라 마치 쫓기듯이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주마간산처럼 깊이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느린 삶을 일부러 살려고 노력합니다. 마치 노동에 지친 몸을 운동으로 기력을 회복하듯이 말입니다.

빠른 것이 다 좋은 것이 아닌 것처럼, 느린 것이 답답하지 않는 삶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오늘 복음 (요한 21: 1-19)의 모습은 좀 다른 상황이지만 참 느리게 흐르는 강물처럼 느릿하게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오늘의 복음 21 장은 사실 복음을 읽는 독자들에게 머리를 긁적이게 하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전 장 20장의 마지막 30-31절이 마치 복음의 마지막 같은 끝맺음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 부분을 읽으며 “다 읽었구나.”하고 생각 하는 데 생경하게 다음 이야기가  더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건 또 뭐지?”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성서 학자들 부활 후의 예수님의 갈릴래아 이야기를 부록처럼 나중에 덧붙인 것이라 설명합니다.

사실 요한복음은 다락방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부활을 확인시켜주고 “성령”과 “평화”를 주며 마지막 교훈, 용서와 화해를 부활의 의미가 되며 이는성령을 통해 가능하며 성령을 받은 제자들의 역할이며 의미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21장을 덧붙여야 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화해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모진 고문을 받을 때 예수님의 예언처럼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닭의 울음소리를 들은 다음에야 예수님의 예언이 생각나 통곡을 합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가 울지도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것에 비해, 베드로의 통곡은 바로 통회의 울음이며 화해의 울음입니다. 부활하시고 다락방에서 베드로에게 따로 말씀을 안 하셨어도 그통곡으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용서하셨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성인이 교회의 수장이 되고 교회를 이끌어감에 있어 많은 이들이 의문을 던지고 더 명확한 설명을 요구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21 장 갈릴래아 이야기가 증편되었으리라는 추측입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화해를 중심으로 흐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성령과 평화를 주시며 세상 구원의 권위를 주셨지만, 아직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제자들은 그들의 출발점인 갈릴래아로 돌아옵니다.

갈릴레아에서 답답함에 시간을 보내려 고기 잡으러 나가도 역시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돌아옵니다. 허탈하게 돌아오는 그들에게 들린 목소리,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이 말에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 요한은 또 곧바로 알아차리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하고 알려줍니다.

여담으로 이 때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히 물고기의 수는 153 마리였습니다. 루카 복음의 5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았지만 몇 마리라고 물고기의 숫자를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 갑작스러운 숫자153을 많은 학자들이 설명하려고 하였지만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아직 없습니다. 많이 잡혔다는 사실 표현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그런데 21장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고기를 잡고 뭍으로 올라온 제자와 예수님의 만남에서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이미 숯불을 피워놓고 아침 준비를 하며 제자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제는 찾아가는 예수님이 아니라 기다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찾아가실 때는 아직 가르칠 것이 있기 때문이고 이제는 제자들에게 성령과 평화를 주며 그 구원의 권위를 주었기 때문에 믿고 기다려주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여집니다.

마치 저녁을 차려놓고 온종일 수고하고 돌아오는 식구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처럼 자상한 예수님의 모습이 정겹습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12) 라고 제자들을 부르시고 준비하신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식사 후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곧바로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16) 라고 답합니다. 이에 또 예수님은 두 번이나 더 똑같은 질문을 하시고 베드로는 섭섭해하며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 때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세 번의 질문과 세 번의 답은 바로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그 죄를 용서하시는 장치입니다. 그리고 세 번이나 “내 양들을 돌보아라.” 라고 당부하며 교회를 베드로에게 맡기십니다.

인간적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한 죄인입니다. 그 죄인이 교회의 수장이 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용서를 강조하시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시지만, 인간적인 감정은 그리 쉽게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미워하고 질투하고 분노하며 단죄하는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용서”는 부활의 열쇠입니다. 용서를 통한 화해는 바로 부활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시어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서 하신 말씀은 성령과 평화이며 그 성령과 평화로 용서의 중요함을 알려주시고 용서할 수 있는 권위를 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마지막으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화해하시며 교회의 수장으로 세우십니다. 꼴찌가 첫째 되는 순간입니다.

교회는 완벽한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지도자를 필요로 합니다. 교회는 상처받은 치유자가 더 큰 위로를 줍니다. 따라서 어떤 이의 말처럼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나는 당신보다 낫습니다.”가 아니라 “저도 죄인이지만 회개하며 겸손되이 주님께 다가가려 노력하는 사람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오늘의 복음을 읽어보면 상황이 참 느리게 흘러갑니다. 아무도 조급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 순간을 거스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그 순간순간을 맞이하고 천천히 관찰합니다. 그 관찰은 평소에 하지 않던 잡은 물고기를 헤아립니다. 백쉰세 마리.

베드로와의 화해도 예수님은 급하게 하지 않습니다. 천천히 아침 식사를 마치시고 베드로의 잘못을 따지지도 않으시고 “사랑”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해결합니다. 급하게 한번이 아니라 천천히 세 번을확인하시며 화해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따르라.” 명령하시며 당신의 제자로 다시 받아들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삶도 이렇게 좀 느리면 좋겠습니다. 너무 “빨리 빨리” 재촉하지 않는 여유로운 삶을 그려봅니다.

봄이 오는 소리에 성급하게 언 눈을 비집고 피는 크로커스도 예쁘지만 “느려터진(?)” 대추도 예쁩니다. 이렇게 느리게 싹이 돋아도 가을이 오면 맛있는 대추가 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라 명령하시지만 빨리 따르라고 재촉하지 않으십니다. 모두가 저마다의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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