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2018년 7월 1일

지난 번 사목회장님이 문득 나의 서품 성구가 무엇이냐고 물어서 잠시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은 사제 수품이나 서원 때에 대게 성경 구절을 선택해 자신의
삶의 방향의 지표로 삶습니다. 이를 보통 서품 성구나 서원 성구라고 하며 영어로는
Motto라고 합니다. 서품 성구는 시간이 흐르면서 기도의 일부분이 되었기에 구지
서품성구라는 표현을 쓰지않았던 차라 이 질문이 어색했습니다.

어느 사제나 수도자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신만의 성구를 만든다는 것은 쉽지않습니다. 그
한 구절에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성구야 삶의 깊이를 더
해가면서 자신의 삶에 더 맞은 것으로 바꿀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서품 때 정한 성구는
좋던 싫던 평생을 품고 사는 말씀이라 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20년 전 신학교 마지막 학기 때에 사제서품을 준비하며 사제로서 어떻게 살것인가를
고민하며 정하였던 성경 구절, 여러 성경 구절이 떠올랐으나 나의 최종 선택은 루카 복음의
예수님의 탄생 예고 장면 중1 장 38절의 성모님의 고백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를 잊지 않기 위해 미사 때 마다
기억하길 바라면서 서품 성작의 밑바닥에 새겨 넣었습니다. “It is for Thee, O Lord, that I
am.”

20년의 사제 생활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이 성구는 이제 서품 성구라기 보다는 그저
일상의 자기 반성이며 자기 결심이 되었습니다. 성모님의 고백은 바로 가장 절대적 믿음의
표현이었기에 사제로의 믿음이 성모님의 믿음 같다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일
것이 때문입니다. 또한 사제의 믿음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절대적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그
무게가 더 무거울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성모님의 신앙을 본받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제 서품 때 교구 주교장은 예비 사제에게 복음서를 전해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에서 읽은 대로 믿고, 믿는 대로 가르치며, 가르친 대로 행하여라.” 결국 복음을 읽고
믿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오늘 연중 12주일의 마르코 복음도 “믿음”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르코 복음의
영성의 중심에는 어느 복음 보다도 절실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어떠한
경우라도 잃지 않을 때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나아가 복음 전체에 깔려있는
안타까움은 바로 믿음이 강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절대적이고
즉각적으로 믿지 않고 인간적 논리로 판단하려는 신도들에 대해 안타가워하며
실망합니다.

오늘의 복음의 12살 소녀의 죽음의 이야기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한 회당장은
죽어가는 딸을 위해 예수님께 엎드려 빌며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함께 나섭니다.

그 사이에 그 딸이 죽었다는 연락이 옵니다. 이에 회당장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려라.” 그리고 그 집에 다달아 슬퍼 우는 이들에게 그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에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죽은 이를 자는 이라 말한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였기에 비웃었습니다. 인간적인
상식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적인 지혜나
상식으로 비웃은 예는 구약에도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 예언했는데 그 부부는 이미
늙은 나이였기에 천사의 말을 비웃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나이 백 살 된 자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고? 그리고
아흔 살이 된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 (창세기 17: 17)

그러나 사라는 임신하여 이사악을 낳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도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갖을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그 말씀을 의심하였고 그래서 요한이 태어날 때 까지 의심한 벌로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소녀의 죽음도 이와 같습니다. 인간적으로 납득이 되는 않는 말에 비웃고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예수님은 담담하게 죽은 소녀 아니 잠자고 있는 소녀에게 명령합니다.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이에 소녀는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닙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의 시대는 로마 황제의 박해를 배경으로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천이 된 로마인들이 로마 화재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대대적인 박해의 희생양이
됩니다. 이에 많은 믿는 이들이 신앙을 저버리기도 하고 배교를 합니다. 이에 교회의
원로들은 약한 믿음에 안타까워하며 믿음을 중요성을 강조하며 복음을 저술합니다.
오늘 복음의 두 기적의 이야기도 결국 믿음의 중요성입니다. 죽은 소녀를 살려낸 기적의
힘은 바로 아버지 회당장의 믿음이 때문입니다. 모두들 비웃어도 회당장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집으로 모셔갔습니다.

그리고 하혈하는 여자의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혈하는 여자는 그 당시
종교적으로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적 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전염병환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또한 격리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여인은 병을 치료하기 위한 온갖 방법을 썼으나 더
심해지기만 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지기만 해도

자신의 병을 치유 할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힘을 느꼈고 이에 예수님은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4)
그 여인을 구한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성모님은 동정으로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는 천사의 예언에 비웃지 않았습니다. 단지
두려워 떨며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의심의 반문이 아니라 더 알고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천사는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루카 1장
참조) 이에 성모님은 고백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당신의
외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에도 하느님을 의심하지 안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의 알량한 지식과 경험으로
판단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러한 믿음을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기도가 필요합니다. 겸손의 기도 그리고 감사의 기도가 절실합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는 노력과 기도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못을
저지르고 자기 정당화 보다도 반성하고 회개하는 기도가 더 절실합니다.

오늘 죽은 소녀를 회생시키시고 하혈하는 여인을 치유해주심은 단순히 깜짝 놀랄만한
기적이 아니라 바로 어린 소녀에게 새로운 삶을 주시어 가족의 품으로 돌려준 것이고,
사회로 부터 소외된 한 여인을 그 사회로 돌려보내 한 일원이 되게하신 것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맨 착한 양의 사랑이 오늘의 기적에서도 드러납니다.

오늘 우리 가족, 공동체 그리고 사회는 각자의 이익으로 서로 반목하는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또한 경제적 문제로 낙태와 스스로 산아제한하는 사회적 통념도
문제입니다. 나아가 인종 차별이나 난민 반대로 점차 확산되어갑니다.
이 모든 것은 뿌리는 두려움입니다. 손해 볼 것을 두려워하고 삶의 무개를 두려워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을 까봐 두려워합니다.

오늘 우리를 보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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