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 2주간 월요일

2020년 12월 7일

오늘은 대림 제 2주간 월요일 성 엠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로 시작합니다. 이제 날씨는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는 듯 싸늘한 아침 공기가 온 몸을 움츠리게 하고 사제관 앞 잔디에는 서리가 내렸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차가운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지긴 합니다.

겨울로의 여정이 두렵지만 매일 몸과 마음이 겨울을 견뎌낼 준비하며 익숙해지는 듯합니다.

가을 보내며 겨울의 추위에 적응할 준비를 하면서 우리는 또 고통스러운 추위를 이겨낼 희망의 크리스마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을 기다립니다. 어느새 두 번째 촛불이 켜지고 우리의 마음도 그 만큼 밝아집니다.

예수님을 맞는 기쁜 일도 준비하며 더 설레고 뿌듯하지만 불편한 것도 준비하며 맞이하면 견딜 능력이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능력 중 하나가 바로 ‘적응력’ 같습니다.

오늘 기념일을 맞는 엠브로시오 성인은 340년 지금의 독일 트레비리 지방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공부하고 밀란의 에밀리아-리구리아 지역 총독을 지내던 중에 주교로 선출되었습니다.

주교로서의 학식과 덕망이 높아 훌륭한 강론으로 많은 이교인을 개종시키고 교회의 이단, 특히 아리우스의 이단에 맞서 정통 그리스도교를 옹호했으며 황제의 교회에 대한 간섭을 저지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특히 마니교에 빠져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개종시켜 교육하여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정립에 바탕이 되게하였습니다. 이렇게 신학자로서의 학식과 주교로서의 사목 모두가 귀감이 되는 분이셨습니다.

이에 엠브로시오 성인은 예로니모 성인과 아우구스티노 성인, 그레고리오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회 학자’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이 싸웠던 아리우스 이단(Arianism)은 기본적으로 하느님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이해의 차이에서 출발합니다. 이는 우리 신아의 기본인 ‘삼위일체’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전통적 신앙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도 결정 되었듯이 하느님 아버지와 하느님의 아들은 똑같은 본질로 태초부터 영원한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인간적 논리는 쉽게 이해 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이 어떻게 똑같냐는 의문입니다. 당시 문화 사회적 배경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능가하거나 같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리우스 이단의 설명은 아들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구원의 목적에 따라 필요한 시간에 인간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이고, 따라서 영원히 존재 하는 분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결국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은 동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니케아 공위회에서도 결정된 전통적 교리인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이 논리를 이단으로 결정합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암브로시오 성인이 반박한 것입니다.

요한 복음의 시작은 이렇게 예수님의 탄생을 설명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서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1: 1-3, 14)

아리우스의 오류는 하느님을 너무 인간적인 사고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점입니다. 신학은 “우리의 신앙을 신비를 이해하려는 학문적 연구 노력’입니다. 이는 신앙을 더 깊게 하려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너무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하느님의 본질을 호도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우리는 ‘신앙의 신비’라고 합니다. ‘신비’를 신비 그대로 믿고 따를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에 대한 ‘갈망’은 그 신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학이고, 그 신학적 노력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리우스가 당신의 문화와 사회 관념으로 하느님을 설명하려 한 노력은 참신하지만 너무 인간적 논리에 집착한 나머지 하느님의 근본적인 신비를 무시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오늘 우리 각자도 신학자는 아니더라도 하느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교회의 모든 교리를 공부하고 강론을 듣고 묵상도 하지만 결국 신비 그 자체로 남을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시고 전지전능하시지만 우리는 유한하고 논리와 지혜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하느님을 쉽게 이해하는 데  집착해서 하느님의 근본적인 본질을 자기 나름대로 호도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부분을 경계해야합니다.  ‘신앙의 신비’는 바로 우리가 기도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부분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 신비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됩니다. 그러면 인간적 집착에서 벋어나 하느님의 지혜로 삶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한 번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식사를 해야 살 수 있듯이, 마치 운동선수가 매일 연습하고 훈련을 하듯이 우리도 매일 기도하고 배우고 생각해야합니다.

오늘 복음(루카 5: 17-26)은 중풍 환자가 지붕을 뚫고 내려와 예수님께 치유를 청하는 장면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환자를 용서하십니다. 이에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용서’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라 의아하게 생각하자 예수님은 바로 환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율법학자는 ‘죄의 용서’에 대해 생각치 못합니다. 판결과 단죄에 대한 생각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발상의 전환’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는 단죄보다는 용서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는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잘못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뜻을 헤아리려 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지식으로 판단한 고집과 아집에 집착합니다.

그들의 신앙이라는 허울 아래 숨은 고집과 아집은 하느님의 본질을 가리고 믿는 이들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논리와 지혜로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지혜와 논리로 세상 살아가면 순간적으로 바보 같습니다. 그러나 길게 보면 우리 하느님의 논리와 지혜가 옳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에 오는 우리는 ‘신앙의 신비’에 귀의하여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생각합니다. 그 신비를 조금 더 이해하길 바라며….

시편 85(84),9ㄱㄴㄷ과 10.11-12.13-14(◎ 이사 35,4ㄷㅂ 참조)
◎ 보라, 우리 하느님이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리라.
○ 하느님 말씀을 나는 듣고자 하노라. 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구원이 가까우니, 영광은 우리 땅에 머물리라. ◎
○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
○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나아가시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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