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2019년 12월 22일

기다림의 끝이 다가옵니다. 기다림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학창 시절 학급 전체가 선생님께 체벌을 받을 때의 기다림은 가장 힘든 기다림 중에 하나였습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속담이 거짓이 아님을 확인하는 기다림이었습니다. 뭔가 좋지 않은 것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과 좋은 일을 기다리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이 두 가지 다른 기다림의 공통점은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고통이나 기쁨을 넘어서 다가오는 현실에 대한 준비가 고통을 줄이거나 기쁨을 배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에서 준비하는 것보다는 불안해하고 걱정하거나 그저 설레는 마음으로 부풀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정작 기다림의 끝에서 실망하고 마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기다림은 준비하는 행동을 동반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자주 말씀하십니다. 대림 제1주일 복음에서 들었던 말씀도 “깨어 있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깨어서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준비하는 기다림의 끝은 그 열매가 꼭 있습니다. 마치 산모의 준비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잘 준비한 산모는 건강한 아이를 잉태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불행한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 갓 서품을 받고 신학교 교장 신부님과 로마의 바티칸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침 일찍 성 베드로 성당 옆 바티칸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집전하시는 미사에 참석하고 난 후 20여 명의 미사 참례자들이 교황님을 알현하는 기회를 갖았습니다.

알현장에 둥글게 20여 명이 서서 교황님을 기다리고, 잠시 후 교황님이 들어오시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교황님께서 한 사람씩 악수와 담소를 나누며 제 차례로 점차 다가올 때, 속으로 생각합니다. 뭐라고 인사할까? 무슨 말씀을 드릴까? 무엇을 물어보실까? 등등

나름대로 속으로 연습하며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 어느새 교황님이 제 옆 교장 신부님께 다가오고 두 분의 말씀 끝에 신부님이 저를 교황님께 소개해 주었습니다. 한국 사람이고 브루클린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신부가 되었다는 간단한 소개에 교황님이 저에게 손을 내밀며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찬미 예수!”

갑작스러운 교황님의 한국말 인사에 깜짝 놀라 준비한 인사말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그저 교황님의 따듯한 악수에 어리벙벙한 얼굴로 교황님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이어 묵주를 주시며 사제수품을 축하해 주셨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다음 사람에게 다가가는 교황님의 뒷모습을 보며 스스로 한심해했지만 그 보다 더 큰 것은 기쁨이었습니다. 만남의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 다시 교황님을 개인적으로 알현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죽는 날까지 기억날 것입니다. 그 기억에 입가에 미소가 띨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기다림의 끝에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성탄의 의미는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요셉 성인과 성모님의 기다림은 이제 우리 모두의 기다림이 되었고 두 분의 기쁨은 우리 모두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든 안 믿든 간에 성탄은 전세계의 축제가 되었습니다.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도 성탄은 왠지 기쁜 날이고 추운 겨울의 날씨도 포근하게 느껴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사랑이 온 세상을 다 품을 정도로 큼을 크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하느님은 요셉에게 일반적인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큰 고통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러나 그 인간적인 고통이 산모의 고통처럼 더 큰 행복과 구원의 열쇠가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번 성탄에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게 어떤 선물을 주실까 생각해봅니다.

어떤 이는 기대했던 선물을, 또 어떤 이에게는 요셉 성인이 받은 고통스러운 선물을 받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똑같이 궁극의 결론은 행복의 씨앗입니다.

이번 기다림의 끝에 모두가 은총이 가득한 선물을 받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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