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2018년 12월 16일

며칠 전 친구 신부와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하다 창밖에 눈발 흩날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를 본 친구 신부가 눈이 온다면 좋아했습니다. 이에 “눈이 오면 안 되는데…” 라며 난감한표정을 짓자. 친구가 말합니다. “난 눈이 좋아. 좀 이상한 주임 신부지?” 이 말에 서로 한바탕 웃을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나의 지론은 여름은 여름 다와야 하고 겨울은 겨울 다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더워야 여름이고 추워야 겨울인 것이 당연하고, 이를 좋아했습니다. 무더운 여름 날씨가 불편하고 힘들어도 여름이 싫지 않은 이유입니다. 쌓인 눈에 길이 덮여도 살갗이 에이는 매서운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겨울이 싫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겨울 눈은 포근함과 아름다움이 아니라 불편함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겨울이 오면 제일 먼저 걱정해야 하는 것은 폭설입니다. 그래서 월동준비는제설 장비를 점검하고 눈을 녹일 소금과 염화나트륨을 충분히 비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으로 기도합니다. “제발 올해는 눈이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오더라도 아주 적게 오게 해주십시오!”

이제는 계절의 아름다움과 그 고유의 정서는 메말라 버리고 현실적인 효율성과 편리함의 논리를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현실을 바라봅니다. “모든 것은 효율적이어야 하고 편리해야 한다.” 이 말은 현재 우리 삶의 진리인 듯이 보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성공의 비결은 이를 충족시키는 것이라 믿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비효율적이고 불편한 것은 사회악인 것처럼 치부되기도 합니다.

이제는 물건을 살 때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아도 되고 집밖에 나가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스마트폰으로 필요한 물건을 찾고 가격을 비교하고 주문하는 일은 그저 눈으로 보고 손가락만놀리면 끝입니다. 며칠 후면 집으로 배달됩니다. 참으로 편리하고 효율적인 세상입니다. 이제는 식료품도 이렇게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쉽고 편리한 삶의 현실에서 물건 하나 사느라고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남은 시간을 우리는 더 건강하게 가족과 함께 보내는가를 생각해봅니다. 그 시간을 나와 내 가족 내 친구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스마트폰이 나왔을 때 가족들 모임이나 외식 때에 아이들이 전화기에 매달려 있는 것에 한탄했습니다. 어느 부모는 식사 때 그 핸드폰을 빼앗는 것이 힘들다고 하소연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애들이나 어른이나 모두 스마트폰에 열중합니다. 가족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같이 식사를 할 때에도 여지없이 눈과 손은 스마트폰에 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효율성과 편리성의 논리는 생산성의 극대화라는 장점이 있지만 결국은 그 효율성에 우리는 인간성을 담보로 한다는 것을 잊습니다. 함께 더불어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을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효율성 앞에서 우리는 기계화 되어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든 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지기도 합니다. 실패를 하면 안되는 완벽한 인간이 되어야 살아남는 무한 경쟁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 효율과 편리를 추구하면서 그것들에 치여 낙오되는 사람이 늘어갑니다. 결국 선과 악의 구분이 아닌 적응한 사람과 도태된 사람으로 구별이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구분이되는 사회는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이 아니라 비판과 경쟁의 사회가 되고 이는 인간성 상실의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경쟁자가 되는 것입니다.

효율성의 극단은 바로 “우리”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편리함의 극단은 바로 이기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주지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돕지 못하며 오직 비판과 판단의 쓸데없는 오지랖만 늘어갑니다.

우리는 누구나 효율적이고 편리한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 효율과 편리성에도 기본적인 윤리가 필요합니다. 바로 그 효율성과 편리성에 아무도 다치거나 도태되어서는 안 된다는것입니다. 효율성과 편리성은 갖은 사람들의 전유물이어서는 안되고 사회 모든 이들이 누려야만 그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구세주께서 오심을 예고하는 세례자 요한께 제자들이 물어봅니다.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에 요한은 대답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3: 11) 나아가 세리에게는 정해진 세금만 받고, 군사들도 정해진 봉급만 받고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불이익을 당했다고 남에게 그 피해를 전가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듯이 내가 힘이 있다고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을 갈취하고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세례자 요한은 역설합니다.

파라오의 학정에 못 이기고 이집트를 탈출한 노예들은 광야 생활의 불편함에 후회합니다. 자유가 없고 일상이 힘이 들어도 집이 있고 적당히 먹을 것도 있는 삶을 그리워합니다. 하느님과 모세에게 투덜거리며 우상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불편한 삶의 현장에서도 아무도 도태되지 않습니다. 40년간의 불편함과 비효율적인 여정에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로 일치하고 서로 도우며 자유를 향해 그 힘든 여정을 이어 나갑니다. 오히려 과부나 고아들을 보살피며 함께 더불어 광야를 지나고 결국 약속의 땅에 도달합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오시는 메시아가 심판과 축복을 함께 가져오심을 예고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시길 기대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각자의 기대가 다르겠지만 결국 우리의 기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잘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준비는 바로 오늘 세례자 요한의 말처럼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로를 돕는 것은 당장 손해를 보는 듯하지만 결국은 서로 이익을 얻는 윈윈 (Win Win)의 상생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심판받는 삶이 아니라 축복받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비판적인 가르침보다는 위로와 격려가 더 큰 깨달음과 변화를 줍니다. 나아가 효율과 편리함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메마르게 할 수 있고, 오히려 비효율적이고 불편한 것이라도 우리의 삶을 좀 더 따듯하고 살만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필립피서 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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