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2019년 2월 3일

이번 연중 4주일의 복음은 지난 연중 3주일 복음인 루카 복음 1장 1-4절과 4장 14-21절의 다음으로 4장의 21절에서 30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지난 복음의 마지막 절,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가 오늘 복음의 시작입니다.

루카 복음은 구약성서에서부터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역사 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지며 그 구원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되도록 하느님께서 계획하시었고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루어짐을 선포합니다. 미래적 구원의 희망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이곳에서 시작되는 구원의 역사적 현장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루카 복음은 인류 구원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읽으면서 염두에 두면 이해하기 쉬운 점은 바로 복음서마다 최초 독자 대상이 특정되어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독자의 대상이 달라짐에 따라 그 복음의 특성이 달라집니다.

마르코 복음은 그 주 대상이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설명한다는 것은 바로 유대교의 전통에 입각한 설명이 주요합니다. 따라서 유대교 율법과 전통을 비교하면서 예수님의 탄생과 말씀을 설명합니다.따라서 예수님의 족보도 아브라함 성조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윗왕의 자손임을 강조하기 위해 14대씩 3단에 걸쳐 예수님의 족보를 설명합니다. (14라는 숫자를 히브리어로 쓰면 다윗과 같은 말입니다.) 또한 마태오복음은 예수님의 기적보다는 산상교훈 같은 가르침이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마태오 복음은 로마의 그리스교 신자들에게 쓰여진 복음입니다. 네로 황제부터 시작한 그리스도인에 대한 극심한 박해에 많은 신자들이 회의하거나 떠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두려움에 떨어 나약해진 신앙심을 독려하기 위해 집필되었습니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의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 권능이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적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그 힘을 믿고 고난을 극복하길 독려합니다.

루카 복음은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입니다. 특히 당시 그리스어를 쓰던 중산계층의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설명합니다. 루카 복음은 그리스어의 수려한 문체와 역사와 문학과 예술, 그리고 의학적으로 박식함이 잘 드러나는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3장에 걸쳐 자세하고도 아름답게 설명합니다. 당시 철학과 문학예술을 즐기던 헬레니즘에 친숙하게 시메온의 노래나 성모님의 마그니피캇처럼 문학적인 수려함이 돋보입니다.

이방인을 위한 복음이므로 예수님의 족보도 아브라함에서 끝나지 않고 창세기 인류의 조상인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만이 하느님께 구원의 선택 받은 민족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선택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구원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하시었고 구 구원은 하느님을 먼저 믿고 따른 이스라엘 민족과 이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따르는 모든 이들이 구원의 역사에 동참한다는 진리를 설명합니다.즉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주어지는 선택적 구원이 예수님을 통하여 누구나 믿는 이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보편적 구원역사의 시작을 알립니다.

이러한 구원의 역사는 루카 복음에 이어 사도행전 제자들의 행적에서 잘 드러납니다. 따라서 성서학자들은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은 1, 2권으로 나누어진 하나의 책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마태오 복음의 복음 구원은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구합니다. 하느님은 단순히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율법이 아니라 사랑임을 강조합니다. 그 사랑은 단죄가 아니라 용서와 화해임을 역설하시고 이를 말씀과 기적으로 설명하십니다. 이에 반해 마르코 복음은 수난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박해받는 이들에게 구원은 그 박해로부터의 자유이고 이 자유는 바로 꺾이지 않는 굳건한 믿음에서 비롯됨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루카 복음의 구원은 바로 사회정의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과 힘없는 이들을 보살피고 도와주는 자비의 하느님임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의 진복팔단의 첫 부분 “마음이 가난한 이는 행복하다.”라고 하지만 루카 복음은 그냥 “가난한 이는 행복하다.”라고 합니다. 실제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선언합니다.루카 복음은 자비로운 “나눔”을 구원의 첫째 덕목으로 보고 있습니다.

부자가 부자이기 때문에 욕먹거나 질투 받지 않고, 가난한 이가 가난하기 때문에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혹사당하지 않는 사회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임을 루카 복음을 드러냅니다. 배타적인 사회가 아니라 이타적인 사회가 바로 그 나라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이러한 루카 복음의 보편적 구원의 관점에서 읽으면 더 확실히 그 의도가 드러납니다. 선민사상으로 배타적인 이스라엘의 신앙심 그래서 이방인과 전통적 율법이 이외의 것에 배타적인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구약의 사건을 예를 들어 틀렸음을 지적합니다. 엘리야 예언자 시대 사렙타의 과부와 엘리사 시대의 나아만 장군은 모두 이방인이지만 하느님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단순히 당신이 선택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이라도 믿는 이를 구원하심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 구원의 우선 조건은 바로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실 엘리사 예언자가 나아만이 찾아와 나병을 치유해달라고 청하였을 때 그 치유 처방은 좀 황당하게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요르단강에 가서 7번을 씻으면 나병이 나을 것이라 일러줍니다. (2 열왕 5:10) 이에 나아만은 화를 내며 떠나갑니다. 더 그럴듯한 치유법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하들의 설득에 마지못해 요르단강에 내려가 일곱 번 몸을 담그자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습니다. (11)

루카 복음의 예수님은 말뿐인 믿음이 아니라 아무리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행동해 보이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이 바로 하느님께 선택되는 길이며 구원의 길입니다. 그래서 믿지 못하고 자신의 얄팍한 지식과 판단과 아집만 믿는 이들을 떠나갑니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하느님 구원 사업의 시작 부분입니다. 루카 복음의 예수님은 당신의 구원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선언합니다. 새로운 역사의 구원은 선택받았다는 기득권이 아니라 믿고 항상 일상의 삶에 그 믿음을 투영하는 것이 바로 구원의 길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 믿는 이들이 이방인일지라도 하느님의 사랑은 공평하게 나누어진다는 진리입니다.

결국 구원은 기득권의 권리가 아니라 항상 하느님 말씀 안에서 새로워지려는 삶입니다. 새로운 삶은 이타적인 배려와 자비의 사랑입니다. 이에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1코린도 13:13)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