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4년 7월 7일오늘은 연중 제14주일로 7월의 첫째 주일을 맞습니다. 본격적인 한여름의 더위가 시작되니 습도가 높아 후덥지근하고 마치 사우나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입니다. 이런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선에서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여러분의 건강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 중의 하나가 망중한입니다. ‘망중유한’에서 나온 말로 바쁜 중에 한가함을 가지는 여유를 말합니다. 바쁜 와중에 한가한 여유를 갖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삶의 여유를 줍니다.
신앙심도 삶의 여유입니다. 삶의 여유는 배부른 자의 노래가 아니라 정신없이 바쁜 사람에게 필요불가결한 삶의 요소입니다. 건강을 위해, 행복을 위해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세상창조를 이렛날에 다 이루시어, 하시던 일을 다 마치고 이렛날에 쉬셨다.’고 창세기는 전합니다. (참조 2: 2)
일에서 쉬는 것은 바쁜 중에 고요함을 유지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평소 일에서 벗어나 주변을 돌아보는 시간을 말하기도 합니다. 창세기는 이렛날을 안식일로 정하여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과 더불어 가족들과 공동체가 함께 모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서로 친밀한 공동체를 이루어 하느님의 사랑이 꽃피게 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더위를 피해 잠시 나무 그늘에 앉아 쉬는 시간은 게으른 한가함이 아니라 다음을 위한 몸과 마음의 정비 시간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시간은 힘들고 귀찮은 시간이 아니라 행복을 만들어가는 시간입니다. 지금 삶의 의미와 목적을 확실하게 하고, 내일은 추억이 되어 삶의 힘이 됩니다.
우리 신앙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삶의 여유를 준다는 사실입니다. 걱정이나 두려움을 떨치고 바쁜 일상에서 한가로움을 찾아 주님께 감사드리고 삶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지면 더불어 행복해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망중한은 한여름 문득 불어와 땀을 식혀주는 산들바람과 같습니다. 무더위를 견디게 해주며, 나아가 세상을 더욱 푸르게 해주는 더위에 감사할 수 있게 합니다. 힘들고 바쁜 일상에 잠시 갖는 여유가 바로 이러합니다.
무더워진 여름 주일 이런 여유로 하느님과 함께 한가로운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안식일의 의미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일의 의미일 것입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은 고향의 회당에서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출신에 대한 편견의 늪에 빠져서 도저히 예수님의 권위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유서 깊은 귀족이나 사제 가문의 자제도 아니고 율법 학자 가문의 자제도 아닙니다. 그의 아버지는 목수였습니다. 그리고 고향 사람들을 당연히 그의 가족 모두를 알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소위 대단하게 성공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게 됩니다. (참고 마르코 6: 1-3)
편견의 늪에 빠진 동네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구원받을 기회를 놓쳐버립니다.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구원 기회조차 방해합니다. 편견은 질투와 오만의 이유가 되고, 질투와 오만은 결국 남을 무시하고 심판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속담과 같은 경우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처지를 보지 않고 남을 평가하고 심판하려는 오류를 흔히 저지릅니다. 한 사람의 내면을 보려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으로 쉽게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드러나는 명품에 영혼을 파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물질적 욕망으로 자기 본질을 가리고 허세 부리기며 자기를 드러내려 합니다. 내가 남을 그렇게 평가하니 자기도 그렇게 하려는 것입니다.
목수인 아버지와 평범한 동네 아주머니 마리아와 평범한 형제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편견의 이유가 될 뿐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이 하는 말은 듣되 그들이 하는 행동은 따라 하지 말라고 경고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삶이 말과 달리 위선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완고한 편견에 예수님은 이렇게 한탄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6: 4)
동네 사람들의 편견으로 인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기에 예수님도 그들을 치유할 수 없었습니다. 치유는 회개하는 사람에게 가능하고, 회개는 말씀을 믿는 이들에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현재 우리의 삶에서도 종종 드러납니다.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고 심판하려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가진 이에게 약하고, 약한 이에게 강한 경향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대부분 자기 보호를 위해 허세를 부리려 합니다. 자기 보호를 위해 허세를 부리는 것은 애처롭지만 남에게 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허세를 부리며 약한 이들 위에 군림하려 하고 세도를 부리려 하고 착취하려는 자들을 사회악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을 위선자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니라 진정한 성취의 기쁨을 위한 삶 그리고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는 물질적인 풍요를 넘어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서로에게 자기를 이해해달라고 조르는 관계가 아니라 상대를 먼저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나의 단편적인 지식이나 정보로 남을 평가하고 심판하기보다, 열린 마음으로 상대를 더욱더 잘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이웃 사랑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언자가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서로 존중해주고 배려하는 관계에서 훈훈한 미소가 자연스럽게 입가에 번지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이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하느님의 나라 모습일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약한 이를 무시하고 명품으로 치장하기보다 오히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는 당당한 그리스도인이길 바랍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코린토 2서 12: 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