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단상

2024년 6월 16일

오늘은 연중 제11주일로 어느새 예수 성심 성월도 중순에 접어듭니다. 예수님의 성심을 통한 구원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입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며 그 큰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 사랑을 묵상하며 우리가 그토록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에 예수님의 계명을 상기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3: 34)

  우리는 먹거리에 관한 관심이 참 많은 시대를 살아갑니다. 얼마나 맛있는가 하는 것을 넘어서 얼마나 건강한가가 우선입니다. 가정의 먹거리를 준비하는 주부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대부분 “무엇이 어디에 좋다더라…” “어떻게 먹으면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더라…” 등등.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에 해롭다는 담배 술은 못 끊으면서 몸에 좋다는 보약과 음식은 열심히 찾아 먹으려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몸이 안 좋으니, 무엇이 좋다더라 하면, 그 말에 귀가 쫑긋해집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나왔나 봅니다. “You are what you eat!”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누구인지 결정된다는 이 말이 생경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특히 가톨릭은 성체를 통해 그 사랑을 확인하고 나누어 먹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결론이 납니다.

  건강한 음식을 먹는 이는 건강하고, 불량식품을 먹는 이는 건강이 불량하게 된다는 사실과 같이 사랑을 먹은 사람은 사랑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잡식 동물이라는 사실입니다. 몸에 건강한 음식만 먹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지 않은 불량식품도 즐겨 먹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만 먹는 것이 아니라 미움도 질투도 욕망도 먹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실 때, 그 마지막에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안타까운 사실은 불량식품이 건강식품보다 더 맛있다는 사실입니다. 유혹이 뿌리치기 힘들게 달콤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원죄도 결국은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 아담과 이브의 잘못입니다.

  유혹과 싸우면 언제나 지게 되어있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유혹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혹과 다른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지금 당장의 이익이 아니라 다음에 오는 더 큰 이익입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더 큰 보상을 위해 현재의 작은 만족을 지연시킬 수 있는 사람은 더 큰 일을 이룹니다.

  더욱 큰 보상인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마음은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합니다. 믿음은 농부가 씨를 뿌리듯 오늘 하느님 나라를 위한 행동을 하게 합니다. 바로 사랑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의 말씀대로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싹을 틔우고 자라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때가 되면 그 열매를 수확하게 됩니다. (참조 마르코 4: 26-29)

  농부는 그 씨가 어떻게 싹을 틔우고 자라는지 모르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하면 씨는 자연스럽게 자라나게 되고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어떻게 갈지 고민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오늘 우리가 씨앗을 뿌리듯 말씀을 실천하면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기대는 실망의 이유라고 합니다. 그러니 기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막연한 기대는 실망의 이유입니다. 반대로 기대가 없는 삶은 무미건조합니다. 메마른 삶의 이유가 됩니다. 현실 가능한 기대를 할 때 설렘이 있고 기쁨이 있고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현실 가능한 기대가 바로 희망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수확을 기대하는 것은 모든 노고를 견디게 하고 기쁨을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믿음의 이유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서 실천하는 것이 바로 씨를 뿌리는 작업입니다. 그러니 수확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또 하느님의 나라는 아주 작은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작은 씨가 땅에 뿌려져서 싹을 틔우고 자라나면 새들도 깃들일 수 있는 커다란 나무가 되는 것처럼, 소소한 실천이 작은 씨가 자라나면 커다란 나무가 되는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소홀하면 큰일에도 소홀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말씀 실천은 아주 작은 것부터입니다. 큰 도움이 아니라 사소한 배려가 오히려 마음을 따듯하게 하고 삶에 의미를 줍니다. 별것 아닌 것에서 우리는 상처 입기도 하고 삶의 희망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아주 작은 일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기도하면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 마주한 이를 위해 화살기도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의 삶과 그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다 알지 못하더라도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씨를 뿌리는 것처럼 확실한 미래를 보장합니다. 우리 희망의 이유가 됩니다. 설렘의 이유가 되고 오늘의 고통을 이겨낼 힘이 됩니다. 그리고 나아가 서로 반목하고 미워하기보다 서로 이해하고 화해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믿지 못하는 이는 막연한 기대만으로 현실을 탓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자신을 되돌아보지 못하고, 남을 탓하고 현실을 탓하고 세상을 탓합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확신에 차 있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 이유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살아가 때문에 확신에 차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실 가능한 확실한 기대를 합니다. 그리고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실천합니다. 실패하더라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실패를 통해 더 깊이 배우고 지혜를 넓혀서 다시 도전합니다. 또 믿는 이들은 남 탓하기 전서 서로 응원하고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지난주 연례 야외 미사를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비록 저는 가지 못해 아쉬웠지만, 다녀온 이들이 모두 즐겁게 지냈다고 보고 받았습니다. 식사 중에 비가 와서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즐거웠다고 합니다. 불평이 아니라 오히려 추억거리가 생겼다고 좋아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 공동체의 힘이고 지혜입니다. 하느님 공동체의 사랑입니다. 함께 더불어 고통을 나누고 응원하는 사랑이 고난을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힘든 상황이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운 추억이 된 것입니다.

  이는 우리 공동체가 아름다운 증거이고, 감사할 이유입니다. 야외 미사에 참석한 모든 공동체 식구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뒤에서 준비하느라 고생한 각 단체장과 구역 반장, 사목 의원과 봉사자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사랑으로 모두가 넉넉한 마음으로 빙그레 웃을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아주 사소하고 소소한 것에서 출발합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코린도 2서 5: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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